믿음의 여전사
에이미 카마이클 (Amy Carmichael)
by (c) 성인경 2008. inkyung@labri.kr
저희 부부가 에이미 카마이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됐습니다. 약 30 여 년 전, 라브리공동체와 이를 세운 쉐퍼 부부(Francis & Edith Schaeffer)가 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에 대해 책을 읽거나 공부할 기회가 없었으나 몇 년 전에야 엘리옷 엘리사벳(Elliot Elisabeth)이 쓴 전기를 한 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위키피디아(wikipedia.org)를 통해 그의 저서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얻고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 안식년을 맞아 그동안 읽고 느낀 바를 몇 자 정리해 봅니다.
1. 어릴 때는 까불이었으나 당찬 처녀였다.
에이미 카마이클은 1867년 12월 6일 영국 아일랜드 북쪽 바닷가 마을 밀라일(Millisle)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데이비드(David)와 어머니 캐스린(Catherine) 사이에 4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에는 지붕 위에 동생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미끄럼을 타고 노는 등, 에이미는 가족들로부터 “지독한 까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썽을 많이 피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버지의 아일랜드 특유의 굳은 소신, 어머니의 믿음과 용기, 북아일랜드 장로교의 엄격성, 추운 겨울바다가 길러준 억척스러움, 대충 넘어가지 않는 부모의 자녀양육 원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야무진 소녀로 자랐습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집을 떠나 3년 동안 요크셔 주에 있는 헤로게이트기숙사학교의 말보루 하우스에서 숙녀로서 가져야 할 기본 교양과 지식을 배웠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벨파스트(Belfast)에서, 당시에 에이미는 겨우 17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직공들을 위한 공부반을 지도했고 YWCA에서는 야학을 맡아서 가르치기 시작 했던 것입니다.
여직공 사역이 소문이 나서 그가 21살이 되던 1888년에는 YWCA 야학에 약 500 여명의 여직공들이 성경공부, 밴드연습, 찬양연습, 바느질클럽, 기도회 등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몰려오는 여직공들을 위해 친구들과 비록 가건물이기는 하지만 ‘양철 예배당’을 지어 헌당식을 올리는 과정에서 터득한 재정정책원칙은 에이미가 얼마나 용기 있고 믿음이 좋은 당찬 처녀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일본에서 실패하고도 다시 인도로 간, 복음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1890년에는 한 사람을 위해 500 여명을 가르치던 잘 나가던 처녀 교사직을 사임했습니다. 그가 선교지로 떠날 때까지 2년간 지극정성으로 섬긴 한 사람은 지병으로 고생하던 윌슨(Robert Wilson)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윌슨은 케직사경회 재정 후원자였으며, 탄광업자였고, 1886년에 있었던 벨파스트 케직사경회 이후로 카마이클 가족과 친해진 사람이며, 에이미가 친 아버지를 여의고 외로웠을 때에 “영적인 아버지”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에이미의 장래에 가장 든든한 경제적, 정서적, 영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는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윌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92년에 케직사경회의 첫번째 선교사로 파송 받아 다음해 5월에 일본 마스에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타문화선교의 어려움과 언어 훈련의 중요성 그리고 일본에 먼저 와 있던 벅스턴 선교사로부터 여유, 관대, 친절, 보호와 같은 사랑의 지도력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본어를 공부하는 중에 뇌염에 걸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상해에서 쉬다가 콜롬보를 둘러 윌슨이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영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약 1년 후, 윌슨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는 다시 케직사경회로부터 재 파송을 받아 인도 방갈로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벨파스트와 일본을 거쳐 이제 인도에서 불타게 되었습니다.
3. 산적 두목과도 친구가 된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에이미가 인도에서 겪었던 일화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 중에 소문난 무법자요 로빈후드 같은 산적 떼 두목이었던 라즈(Raj)라는 남자와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그를 전도했다는 이야기는 드라마같이 재미가 있습니다. 에이미는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라즈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그를 밀림 속 비밀 아지트에서 만나 안면을 트고 친구를 삼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 후 라즈가 범죄 행위와 탈옥을 반복하다가 한 번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에이미가 ‘라즈가 갇혀 있는 교도소의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죄수들이 탈옥을 하는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에이미가 꿈을 확인하기 위해 급히 그를 만나러 감옥에 도착해 보니, 옥문이 진짜 열렸으나 그 산적 두목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감방에 앉아 있었답니다. 에이미가 그에게 “세례를 받겠느냐?”고 했더니, 그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기에 목사를 초청하여 곧 바로 세례를 받고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동료들과 감옥에서 탈옥한 라즈를 인도 경찰 300명이 추적을 하고도 잡지 못했으나 에이미가 비밀리에 숲 속에서 만나 “당신이 이제는 나쁜 짓을 그만 하고 무기 없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소.”라는 말을 전했는데, 얼마 후에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산적은 죽기 전에 에이미에게 자기 자식들을 미리 부탁해 두었답니다. 에이미는 강한 여자였으나 인간미가 넘치고 친절하여 많은 사람들을 푸근하게 했습니다.
4. 수많은 버려진 아이들의 “암마”였다.
처음에 에이미는 인도에서 성공회의 규방선교회가 추진하고 있던 의료선교를 많이 했는데, 방갈로에서 팔람코타, 파나이빌라이 그리고 도나부르까지 가서 천막을 치고 전도를 했습니다. 1901년 3월 7일, 그날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어릴 때에 엄마에 의해 힌두교 사원에 바쳐져서 그곳에서 살다가 죽기 직전에 도망쳐 나온 소녀 프리나가 에이미의 가슴에 안기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프리나는 그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엄마처럼 나를 무릎에 안고 뺨에 뽀뽀를 해 준 사람이 에이미였습니다. 그 날부터 에이미는 나의 암마가 되었고 나는 그의 딸이 되었습니다.” 프리나 때문에 에이미는 “어린이 도둑”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시집도 가지 않았지만 수많은 아이들의 “암마”가 되었습니다. 타밀어로 ‘암마(Ammai)’는 ‘엄마’라고 합니다.
에이미는 진정한 암마 노릇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먹고 자고 일할 수 있는 생활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버려진 아이들의 도피성, 도나부르공동체(Dohnnavur Fellowship)입니다. 거기에는 부모들이 버린 아이, 사원에서 도망 나온 아이, 사원으로 팔려가던 아이, 집 나온 아이, 병들어 버려진 아이, 미혼모들의 아이들이 모였고 1951년 1월 18일 에이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공동체 식구는 병원 동역자들을 포함하여 약 1,000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지난 100년간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자라서 가정을 꾸리거나 훌륭한 인도의 일꾼들이 되었을까요?
5. 정부의 보조를 받거나 후원회를 조직하지 않은 기도선(祈禱船)의 선장이었다.
에이미는 인도에서 50년간 때로는 수 백 명, 수 천 명을 먹이면서도 한 번도 정부의 보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정 후원회를 조직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 제목처럼, [전대도 없이(Nor Scrip)] 하나님만을 믿고 기도로 살았습니다. 도나부르 기도선(祈禱船)의 선장다운 그의 재정 운영원칙에 대한 언급들을 몇 가지 수집해 보았습니다.
첫째, 기도는 우리가 하는 사역의 중심이다. 기도는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둘째, 기도 외에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돈이다.
셋째,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고 우리 대신 누가 부탁하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넷째, 누가 묻지 않는 한 우리의 필요를 알리지 않는다. 물을 때라도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리기보다 될수록 침묵한다. 왜냐하면 다른데 가야할 돈이 우리에게 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돈 외의 다른 필요들에 대해서는 세부적이고 자세하게 알린다. 예를 들어, “색연필과 장난감 딸랑이가 더 필요합니다.”
여섯째,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의 “인장도장이 찍힐 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식양대로 될 때”를 기다린다. 즉 “지목헌금”이나 “공사 착수금”이 들어와서 하나님으로부터 확인 증표가 보이기 전에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일곱째, 하나님은 친히 지시하신 돈에만 책임을 지시며 장부를 결재해 주신다.
여덟째, 오해나 부정이 있는 돈은 돌려주거나 받지 않는다.
아홉째, 헌금마다 각기 사연이 있다. 헌금은 지목한 대로 사용한다. 그 예로 미국에서 온 260달러는 “뭔가를 끝마치는데 사용해 주세요.”라는 메모대로 ‘방충망’을 다는데 사용했다.
열째, 우리가 손익을 따지고 있을 동안 사탄은 기회를 포착한다.
라브리에도 “학생, 재정, 동료를 광고나 모금, 모집을 통해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기도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에이미 카마이클과 죠지 뮬러, 허드슨 테일러가 가졌던 100년 전 기도로 살아갔던 이런 믿음선교(faith Mission) 정신을 본 받은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대가 부럽기도 하고 겁도 납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굶어 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는 이렇게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6. 큰 보자기로 묶을 정도 이상의 살림을 원치 않았던 청빈한 순례자였다.
그러면 카마이클은 스트레스도 안 받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무리 믿음의 여전사라고 하더라도 매일 수 백 명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고, 그들이 머리를 기대고 잘 침대나 방과 시설물도 필요하고, 매일같이 고장 나는 시설물 수리비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최저 월급이라도 줘야 하는 상황에서 재정적인 스트레스가 전혀 없었다면 말도 아닙니다. 에이미 카마이클도 인간인지라 그도 종종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있었다.” 믿음의 여전사 입에서 “당연히”, “스트레스”라는 말이 나오다니 무슨 말입니까? 아래의 시를 한 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번잡한 인생길의 압박감과,
끝없이 흐르는 삶의 물소리,
발이 파묻히는 진흙까지도,
주여 그대로 견디게 하소서.
우리 영혼을 높이 드소서,
별에서 별로 오르렵니다.
머나먼 천국에 이르기까지,
주와 함께 인생길 걷습니다.
이 시를 읽어보면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도 없었습니다. 만약 비결이 있었다면,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이빨을 깨물고 참거나 가난하게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큰 보자기로 묶을 정도 이상의 살림을 원치 않는다.”고 자주 말했던 에이미가 남긴 유산은 방 한 칸에 걸려 있던 액자 몇 개와 옷가지 몇 벌 그리고 필기도구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평생 그의 최대 호사(好事)는 “따뜻한 물에 목욕하는 것”과 “책에 둘러싸여 독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선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산 청빈한 순례자였습니다.
7. “쓰레기처리장”을 섬길 좋은 동료를 찾던 고집쟁이였다.
저희 부부는 라브리를 종종 “하수종말처리장”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에이미는 도나부르 공동체를 “쓰레기처리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에이미도 바울 사도가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린도전서 4:13)는 말씀을 공동체에 적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쓰레기처리장에서 같이 일할 동료들이지만 동역자를 구할 때는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고 그것만은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동역자에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기도 동역자들은 도나부르의 기도제목을 매일 같이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들이고, 현장 동역자들은 매일 수 백 명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가르치고 치료하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보모, 목사, 약사, 간호사, 의사, 요리사 등을 말합니다. 전기 작가들이 찾아낸 “도나부르 공동체의 비수 같은 현장 동역자 찾기 어록”을 읽어보면 쓰리기장 청소부 조건치고는 그 기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아이들을 돕는 사람들이지만 여기에서 일할 사람은 사려 깊은 지성에 연단된 성품을 가지고 있고 타고난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영예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도나부르 일에 비하면 설교는 찻숟가락의 은혜로도 족하나 이 일에는 강물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정말 십자가의 삶을 살 의향이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주님과 우리에게 십자가가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한 오지 마십시오. 아주 천한 일들도 그 분의 이름을 위해 즐겁게 일 할 수 있거든 오세요.”
에이미 카마이클은 “고집이 세고”, “독재자이며”, “극단적인 데가 있으며”, “아무도 그렇게 살 사람은 없다.”는 등의 여러 가지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녹 쓸기보다는 탈진하고 말겠다.”는 그의 소원대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살다가 도나부르 공동체와 15권의 저서를 남기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고, 향년 84세에 인도에서, 그가 그토록 사모한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기회(a chance to die)를 엿보고 있는 에이미 카마이클과 같은 일꾼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닐까요?
라브리공동체 www.labr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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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읽고 있는 책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의 일화로 등장하는 인도 선교사이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인도의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였으며...인도의 한 동굴속에서 기도하다가 사탄이 방해하기 보여주는 것들에 시달렸다고 한다.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어서 혼자 외롭게 늙어 가는 장면이었다. 사탄은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하나보다.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그때 그녀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으니...
'나를 신뢰하는 자는 외롭지 않다.' 그 뒤로 평안을 가지며 사역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미래를 아는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어떠한 사탄의 방해도 방해가 진실이 아니다 그는 거짓의 영이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외롭지 않다.
너무나도 마음을 치는 말이었다. 난 외로워했던가...바로 어제 업무에 대해 혼자 해야함에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내 업무와 우리 회사의 장애처리에 대해 말할자가 없음을 외로워 했으며 결혼한 친구를 보며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연애를 할 때도 외롭긴 마찬가지...외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주님과의 교제의 결핍이다. 에이미 카마이클의 경우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러주신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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